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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포창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458
한자 羅里鋪倉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종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720년연표보기 - 나리포창 설치
개정 시기/일시 1787년 - 나리포창 나주로 이설
관할 지역 나리포 -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나포리 원나포 지도보기

[정의]

조선 후기 군산[나포]에 설치한 제주(濟州) 구제(救濟) 전담 기구.

[개설]

나리포창은 1720년(숙종 46)에 금강 일대의 상인 활동의 불편 해소를 위해 설치하였다. 이후 제주 진휼을 위한 전담 창고로 성격이 변화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나리포창(羅里鋪倉)금강 상류 지역의 어염 수요자가 직접 금강 하류까지 와서 구매해야 하는 불편을 해소하고, 진휼청(賑恤廳)의 재원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하였다.

[관련 기록]

『여지 도서(輿地圖書)』에 "나리포창(羅里浦倉)나포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798년(정조 22) 『정조 실록(正祖實錄)』에는 "나리포창의 곡식을 여러 고을에 나누어 담당케 하다“라는 기록이 있다.

[내용]

나리포창(羅里鋪倉)금강 상류와 하류 사이의 상인 활동이 활발하지 않아 공주와 연기 접경 지역인 나리촌에 별장을 설치하고, 배를 만들어 금강을 오가며 어염(魚鹽)을 판매한 수익금을 바탕으로 진휼곡으로 활용하려는 목적으로 1720년(숙종 46)에 만들었다.

나리포창이 제주(濟州) 진휼(賑恤)을 위한 전담 창고로 성격이 바뀐 것은 1722년(경종 2)이었고, 위치도 임피로 옮기게 되었다. 임피로 옮긴 후 구체적인 운영 방식은 알 수 없다. 다만 이전에는 연안 지역에서 생산된 어염과 호조 세염(稅鹽)을 판매하여 진휼곡을 확보하는 방식이었으나, 임피로 이설한 이후에는 제주에서 생산된 상품이 교역 대상이 되었다. 즉 제주에서 보낸 진휼곡의 댓가로 양태와 미역, 말총 감투, 전복 등의 상품을 보내오면, 그 판매 대금으로 다시 곡식을 확보하는 형태로 바뀐 것이다. 또한 제주에서 보낸 상품을 판매한 대금은 이전에 보냈던 진휼곡을 보전하고, 나리포창의 각종 운영 경비도 그 안에서 충당하였다.

조선 정부에서는 나리포창이 효율적으로 운영된다면 상당한 이윤이 창출되어 제주의 진휼을 원활하게 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여분의 곡식도 비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실제 운영을 보면 기대와 달리 제주와 연해읍(沿海邑) 백성에게 부담만 가중시켰을 뿐이고, 이 때문에 1720년 나리포창 개설부터 1787년 나주로 이설할 때까지 모두 12차례나 운영 규정을 개정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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