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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450
한자 朝鮮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종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창 시기/일시 1392년 7월 17일[음력]연표보기 - 조선 왕조 개창
폐지 시기/일시 1408년 - 옥구 수영 폐지
설치 시기/일시 1426년 - 옥구 북쪽 진포에 군산진 설치
설치 시기/일시 1487년 - 용안 득성창을 나누어 군산창에 조창 설치
설치 시기/일시 1624년 - 군산도에 별장 파견, 고군산진이라고 명명
설치 시기/일시 1720년 - 나리포창 설치
성격 조선의 역사

[정의]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전라북도 군산 지역의 역사

[개설]

조선 왕조는 1392년(태조 원년) 7월 17일[음력] 이성계(李成桂)[1335~1408]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1345~1394]에게서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오름으로써 시작되었다. 전라북도 군산 지역은 조선시대에 임피현옥구현에 주로 속해 있었다.

[행정 구역]

군산시는 조선시대 옥구현임피현 지역에 해당하며 전라 우도에 속해 있었다.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읍격의 변화는 없었다. 『경국 대전』 편찬 당시 옥구현은 종6품의 현감이 부임하는 고을이었고, 임피는 보다 큰 지역으로 한 등급 높은 종5품 현령이 부임하는 고을이었다. 읍격은 1895년(고종 32) 전국이 23부제로 개편되면서 옥구현임피현이 각각 옥구군임피군으로 바뀔 때 까지 변동이 없었다. 이후 임피군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옥구군에 병합되었다.

[군사 체계]

1. 옥구진

1397년(태조 6)에 군사 단위로서 도를 폐지하고 각 도에 2개 내지 4개의 진(鎭)을 설치하였다. 이들 진은 연해안의 방어를 목적으로 연해안에 설치되었다. 이때 전라도에는 목포, 화양, 옥구, 흥덕 등 4곳에 진이 설치되었다. 이에 따라 전라도는 전임 도절제사제가 혁파되고, 4개의 권역으로 나뉘어져 각 진의 첨절제사들이 각 권역의 군사를 관장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시대 임피현의 속현이었던 옥구현은 주변의 군산까지 총괄하는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옥구진의 첨절제사는 군사 업무와 함께 옥구현의 목민관 역할을 수행하였다. 옥구진에는 세종 대에 정군이 300명이었으며, 1462년(세조 8)에는 군액이 조금 더 늘어 총 400명이었다. 또한 문종 대를 즈음해 옥구진에는 화차(火車)가 10여 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군산진

고려 말 군산도에 있던 수군진이 폐지되고 1408년(태종 8) 옥구 수영이 폐지된 이후 1426년(세종 86) 이전에 옥구 북쪽 진포군산진이라는 이름으로 수군진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실록 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당시 군산진에는 중선 4척, 별선 4척 등 전선 8척에 수군 461명이 상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15세기 말 편찬된 『경국 대전(經國大典)』에는 군산포는 종 4품 수군 만호(萬戶)가 거느리고 대맹선(大猛船) 1척, 중맹선(中猛船) 2척, 소맹선(小猛船) 1척, 무군 소맹선(無軍小猛船) 4척 도합 8척의 전선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맹선은 80명, 중맹선은 60명, 소맹선은 30명의 수군을 승선시키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경국 대전』에 따르면 군산진에는 230명의 수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3. 고군산진

조선 후기 군산 지역의 군사적, 경제적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기존의 1624년(인조 2)에 군산도에 별장(別將)이 파견되어 고군산진이라고 칭하고 방패선(防牌船) 1척을 배치하였다. 고군산진에 수군진이 설치되면서 군산진고군산진의 업무는 명확히 구분되었다.

군산진은 조운 업무를, 고군산진은 해방 업무를 각각 담당하였다. 업무의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이곳을 관장하는 관리에게는 타 지역과 달리 많은 특전이 부여되었고, 군산진의 첨사는 2년간의 조운 업무를 무사히 완수하면 종 2품 방어사로 2계급 특진되었다.

고군산진은 원래 해남에 있는 전라 우수영 소속의 진(鎭)이었으나 1780년(정조 4)부터 고군산진 첨사가 영장(營將)이 되어 칠산도 이북 즉 위도, 법성포, 영광, 군산, 검모포 등 5읍진의 수군 훈련을 우수영을 대신하여 관장하였다. 그러다가 1799년(정조 23) 고군산진은 우수영으로부터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는 독진(獨鎭)으로 승격되었고, 고군산진 옆에 있던 만경 현령[종 5품] 역시 고군산진 첨사의 지휘·감독을 받는 등 육상 일부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19세기 이후 서해에 이양선이 출몰하면서 『만기 요람』에 의하면 고군산진은 당시 조선의 수군진 가운데 최대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1895년(고종 32) 총리 대신 김홍집, 내무 대신 박영효에 의해 고군산진은 해체되었고, 1909년(융희 3) 내각 총리 대신 이완용은 그나마 남아있던 고군산진 건물도 일반인에게 매각하면서 고군산진은 흔적만 남게 되었다.

[조운 제도]

1. 군산창

군산창은 군산포에 자리하고 있었다. 군산창의 조운에 관계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을 보면 『신증 동국 여지 승람』 옥구현조에는 “군산창군산진 곁에 있는데 성종 18년 용안 득성창을 나누어 이곳으로 옮겼다.”라고 적고 있어 처음 군산창에 조창이 설치 된 시기를 1487년(성종 18)으로 적고 있다. 또한 전라도 관찰사 남곤(南袞)은 “서천포는 해구에 자리하나 군산포는 다소 내지에 위치하고 있다. 여러 읍의 전세(田稅)를 거두어 바로 배에 싣고 출항하여 오식도에 이르렀다가 상경하면 되므로 훨씬 편리하다. 그러나 군산전은 세미를 포구까지 날라야 하는데 득성창 보다 다소 멀고 조항 출입이 불편하므로 부득이 쌀을 포구에 저 나르자면 만조 때에는 침수되고 진 뻘에 빠질 우려가 있다.”라고 하여 군산포가 조수 간만의 차이가 크고 그로 인한 불편함 때문에 규모가 큰 조함의 출입이 어렵다는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득성창의 역할을 나누어 조창의 역할을 하던 군산창은 1512년(중종 7)에 용안 득성창의 기능을 모두 옮겨 오고, 법성포에서 수납하던 흥덕·고부·정읍·부안 등의 조세마저 수납하는 호남 지역 조운 창고로 바뀌게 된다. 그리하여 군상창 주변의 용안·전주·임실·남원·임피·김제·장수·금구·운봉·익산·만경·여산·금산·진산·태인·옥구·진안·고산·무주·함열 등 덕성창이 원래 관할하던 고을과 새로 법성포창에서 이관한 흥덕·부안·고부·정읍 등 24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 보관하였다가 서울의 경창(京倉)으로 조운하였다.

군산창의 규모를 알 수 있는 『속대전(續大典)』 기록에 의하면 “군산창에는 조함이 18척 조군이 816명이라고” 적고 있어 조군에 포함된 가족과 하급 관리 등 여타 인구와 일반 백성의 숫자까지 합하면 적어도 1,000~2,000여 명이 거주하는 해창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산창은 조선 왕조의 몰락과 함께 1895년(고종 32) 성당창과 함께 폐지된다.

2. 나리포창

나리포창(羅里舖倉)은 1720년(숙종 46)에 금강 상류와 하류 사이의 상인 활동이 활발하지 않아 공주와 연기 접경지역인 나리촌에 별장을 설치하고, 배를 만들어 금강을 오가며 어염(魚鹽)을 판매한 수익금을 바탕으로 진휼곡으로 활용하기위해 만들었다.

나리포창이 제주(濟州) 진휼(賑恤)을 위한 전담 창고로 성격이 바뀐 것은 1722년(경종 2)이었고, 그 위치도 임피로 옮기게 되었다. 임피로 옮긴 후 구체적인 운영 방식은 알 수 없다. 다만 이전에는 연안 지역에서 생산된 어염과 호조 세염(稅鹽)을 판매하여 진휼곡을 확보하는 방식이었으나, 임피로 이설한 이후에는 제주에서 생산된 상품이 교역 대상이 되었다. 즉 제주에서 보낸 진휼곡의 댓가로 양태와 미역, 말총 감투, 전복 등의 상품을 보내오면, 그 판매 대금으로 다시 곡식을 확보하는 형태로 바뀐 것이다. 또한 제주에서 보낸 상품을 판매한 대금은 이전에 보냈던 진휼곡을 보전하고, 나리포창의 각종 운영 경비도 그 안에서 충당하였다.

이후 나리포창은 기대와 달리 제주의 진휼 문제의 해결 보다는 오히려 제주와 연해읍(沿海邑)의 백성에게 부담만 가중시키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1787년(정조 11) 나주로 이설되었다.

[사회와 경제]

1. 인구

조선시대에는 역역(力役)과 조세를 부과하기 위해 각 군현 별로 3년에 한 번씩 호구를 조사하여 호적 대장을 작성하였다. 조선시대 호구 조사가 오늘날과 같이 당시의 인구를 정확하게 보여준다고는 할 수 없으나 조선시대 호구 조사 자료를 통해 당시의 인수 추이와 규모 그리고 사회 경제적 상황 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조선 초기를 살펴보면 먼저 『세종 실록 지리지』에 등재된 세종 대의 옥구현은 종 6품의 현감 고을이었으며 호수는 257호이고 인구는 1,194명이었다. 임피현은 더 큰 현령 고을로 396호에 1,949명이었다. 이를 토대로 보면 조선 초기 군산 지방의 유역자(有役者) 호수는 653호이고 유역자 수는 총 3,143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군산 지역 인구수는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 총수』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이 당시 옥구현은 면이 8개이고, 그 면 아래 리가 83개였다. 옥구 지역의 전체 호수는 4,446호이고, 인구는 14,649명이었다. 이들 중 남자는 6,602명이고 여자가 8,047명으로 여자가 더 많았다.

임피현은 13개 면과 그 면 아래 108개의 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임피현의 총 호수는 4,469호이고, 인구는 총 22,131명이었다. 이들 중 남자는 8,797명, 여자는 13,344명으로 임피현 역시 여자 인구가 더 많았다.

옥구현임피현의 인구를 합해보면 1789년(정조 13) 기준으로 볼 때 군산 지역의 호구 총수는 8,915호에 36,780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토지

조선은 매 20년 마다 한 번씩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하였는데 그 단위는 결부제였다. 결부제는 삼국 시대부터 양전의 단위로 사용되었으며 조선의 결부제는 토지의 면적과 그 토지에서의 수확량을 2중으로 표시하는 계량법을 사용했다.

결부제에 따라 현재의 군산 지역에 해당하는 당시 옥구와 임피의 토지면적을 『세종 실록 지리지』를 통해 살펴보면 옥구의 총결수는 4,444결이며 이중 70%가 논이다. 반면 임피는 옥구 보다 토지가 넓어 총결수가 6,447결이고, 이것 중 70%가 논이다. 옥구와 임피의 토지를 합해보면 세종 대 군산 지역의 토지는 모두 10,891결이고, 이중 논이 70%를 차지하였다.

조선 후기의 토지 사정은 1871년(고종 8)에 간행된 『호남 읍지』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 옥구는 총 2,622결에 논이 1,853결, 밭이 505결, 각 궁방전이 264결이었다. 임피는 총 7,963결에 논이 5,303결, 밭이 2,660결이었다.

『세종 실록 지리지』와 『호남 읍지』가 당시의 사정을 정확하게 보여준다고는 볼 수 없으나 조선 초기와 비교해 조선 후기 군산 지역의 토지 면적은 증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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