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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978
한자 潘碩枰
이칭/별칭 공부(公父),송애(松崖),겸제(謙齊)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두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72년연표보기 - 반석평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07년 - 반석평 생원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07년 - 반석평 문과 급제
몰년 시기/일시 1540년연표보기 - 반석평 사망
출생지 반석평 출생지 - 전라북도 군산시
거주|이주지 반석평 이주지 - 서울특별시
묘소|단소 반석평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조안리
성격 문관
성별
본관 광주
대표 관직 예조 참판|팔도 관찰사|공조 참판|한성 부윤|형조 판서

[정의]

조선 전기 군산[옛 옥구현] 지역 출신의 문관.

[개설]

반석평(潘碩枰)옥산면에서 나고 자랐으며,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열심히 공부하여, 1504년(연산군 10) 식년시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이어서 1507년(중종 2)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예조 참판, 성절사, 공조 참판, 병마 절도사, 팔도 관찰사, 형조 참판, 한성 판윤, 경연 특진관, 형조 판서 등 문무 관료를 두루 거쳤다. 곧 반석평(潘碩枰)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가계]

반석평의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자(字)는 공부(公父)이다. 광주 반씨 시조이며, 태조 때에 개국 원종 공신으로 녹훈되고, 행양군 광주백(光州伯)으로 책봉된 반충(潘忠)의 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선략 장군 충무위 부호군을 지낸 반사덕(潘思德)이며, 할아버지는 한성 판윤과 경성 판관을 지낸 반강(潘崗)이고, 아버지는 이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지낸 반서린(潘瑞麟)이다. 외할아버지는 호군을 지낸 장지(張智)[본관은 회미]이고, 장인은 생원 박계형(朴桂亨)[본관은 남양]이며, 후처 아버지는 창원 부사 이장(李檣)[본관은 예안]이고, 세 번째 부인의 아버지는 조구령(趙龜齡)[본관은 진보]이다.

[활동 사항]

반석평은 1472년(성종 3)에 태어나, 1540년(중종 35)에 사망하였다. 현재의 군산시 옥산면에서 나고 자랐으며, 아버지 반서린(潘瑞麟)의 묘가 해방 이후까지 군산시 회현면 고사리에 있었으나 근년에 충청북도 음성군으로 후손들이 이장을 하였다. 어릴때 어머니 장씨가 친히 글을 가르쳤으나, 점점 자람에 장씨가 말하되,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려면 견문이 없는 궁벽한 곳에서는 아니된다.”라고 말하고 곧 반석평과 그의 형 반석정, 동생 반석권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해서, 좋은 선생을 찾아 공부를 시키니, 세 아들이 과연 명성을 얻게 되었다.

반석평은 1507년(중종 2) 식년시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이어서 같은 해 식년시 문과에 병과 22등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홍문관 교리, 춘추관 기사관을 지냈다.

경차관(敬差官)으로 함경도에 파견되어 여진의 동정을 보고했으나 천얼 출신[어머니 장씨가 친모가 아니고 친모는 아마도 평민이나 천민이었을 것으로 추정]이라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반석평은 인사 때 마다 신분 문제로 끊임없이 시비의 대상이 되었지만 인재 발탁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안당(安塘)정광필(鄭光弼)의 후원을 받아 잘 헤쳐 나갈 수 있었다.

1516년 정광필의 추천으로 종 5품으로서 경흥 부사가 되었고, 1522년 만포진 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를 거쳐 함경남도 병마 절도사가 되었으나, 1524년 군기를 살피지 않고 도로 사정을 잘못 보고했다는 이유로 탄핵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병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1527년에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 1530년에 경연 특진관(經筵特進官)과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531년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예조 참판과 전라도·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1533년 다시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미 한번 역임한 바 있고 또 문신이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반대가 있어 부임하지 못하였다.

1536년 10월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공조 판서로 임명되었으나 시종(侍從)이나 대간(臺諫)을 역임하지 않았다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반대로 1536년 10월에 공조 참판으로 고쳐 임명되었다. 1537년에 함경도 관찰사, 1538년에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539년에는 동지중추부사·형조 참판·한성부 판윤·형조 판서 등을 지내고 이듬해 오위도총부 도총관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40년 5월에 사망하였다.

청렴하고 겸공한 관리로 이름났으며,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학문과 저술]

「관산별곡(關山別曲)」, 「한벽루(寒碧樓)」, 「봉의산(鳳儀山)」 등이 있다.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조안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증직으로 의정부 좌찬성을 수여 받았고, 시호(諡號)로 장절(壯節)이 내려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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