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8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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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東盧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서수면 |
집필자 | 김두헌 |
성씨 시조 | 노만(盧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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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 시조 | 노윤적(盧允迪) |
[정의]
조선 시대 군산 지역[옛 임피현]에 세거한 성씨.
[개설]
안동노씨 이조판서공파 노윤적(盧允迪)이 15세기 중엽에 안동에서 임피현 서수면에 입거한 이후 후손들 중에 일부가 서수면 일대[마룡리, 서수리, 장상리]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여 왔다.
[연원]
안동노씨의 시조는 노만(盧만)이다. 당나라 선종 시대 대호군을 지낸 노수(盧穗)의 아홉 명의 아들 중 다섯째 아들이다. 노만의 후손 노우(盧祐)가 고려 정부에서 이부 상서와 평장사를 지냈으며, 사실상 안동 노씨의 시조가 된다. 노우의 손자 노영길(盧永吉)은 형부 상서를 지냈고, 안동부원군에 봉군되었으며, 안동에서 김제로 이주하였다. 노영길의 아들 노숭(盧崇)은 이부 상서와 문하시중을 역임하였다. 이들의 후손들은 김제, 전주, 임피, 익산 등지에서 산거(散居)하여 살아왔다.
[입향 경위]
노우(盧祐)의 7세손인 노윤적(盧允迪)은 당대 유명한 효자로, 성리학에 통달하였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이조 판서를 지냈다. 15세기 중엽에 자신의 처가가 있는 임피로 입거하였다. 노윤적의 처부(妻父)인 양권(梁權)은 1401년(태종 1)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남원 양씨 옥구 입향조인 양의생(梁宜生)의 차자(次子)이다.
[현황]
노윤적이 임피현 서수면에 입거한 이후 후손들 중 일부가 서수면 일대[마룡리, 서수리, 장상리]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여 왔다. 또 다른 후손들은 김제, 익산 등지에 산거(散居)하였다. 1990년에 발간된 『옥구 군지(沃溝郡誌)』에 의하면, 당시 안동노씨가 서수면 마룡리 일대에 34가구 145명, 서수리 일대에 16가구 67명, 장상리 일대에 15가구 60명이 살았다고 한다. 2000년 이후 군산 지역에 거주하는 안동노씨 현황에 대해서는 조사된 사례가 없어 파악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