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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428
한자 鐵器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선사/철기
집필자 곽장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철기를 이용한 시대

[정의]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철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을 근거로 밝혀진 철기시대 역사와 문화.

[개설]

인류의 역사에서 철의 등장은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시대로 전환을 의미한다. 철은 청동기 시대에 사용된 청동에 비해 산출량이 더 많고 돌이나 청동에 비해 단단하여 오래 쓸 수 있기 때문에 무기류나 농·공구류 제작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그만큼 무기의 발달에 따른 전쟁 양상의 변화와 함께 농업 생산력의 증가, 제련 기술의 발전 등은 국가 형성이라는 급격한 사회 변화를 이끌었다. 우리 주변에서 가장 친숙하게 접할 수 있는 철은 무기류와 농기구류, 신앙 대상물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었다.

우리나라에 철기가 출현한 시기는 기원전 300년 무렵이다. 중국과 인접된 북쪽에서 연나라 화폐인 명도전(明刀錢)과 함께 철기가 처음으로 출현하였다. 중국의 제철 기술을 받아들여 시작된 우리나라의 철기 문화는 무기류와 함께 낫·괭이 등 농기구류도 포함된 점에서 이미 일상 생활에 널리 보급됐음을 알 수 있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부의 축적이 이루어졌고, 철제 무기를 사용하여 주변 지역을 정복하여 차츰 고대 국가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철기 문화의 유입 경로]

기원전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중국 연과 고조선의 무력 충돌로 고조선 유이민들이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새로운 격변의 시기를 맞는다. 고조선 멸망 이후 준왕의 남천으로 만경강 유역이 새로운 거점지역으로 급부상한다. 익산 신동, 완주 갈동·신풍 유적 등 초기 철기시대의 분묘 유적이 만경강 유역에서 대규모로 등장한다. 당시 익산과 완주 일대가 테크노 벨리로 급성장한 것은 군산을 중심으로 해상 교통로와 내륙 수로가 그물 조직처럼 잘 구축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의 선진 문물이 해상 교통로를 따라 전파될 때 군산은 만경강 유역의 큰 관문이었다. 그리고 만경강 유역에서 새로운 철기 문화의 유입으로 초기 철기 문화가 융성할 때도 해양 경제의 배후지 든든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를 증명해 주듯이 청동기 시대 후기를 지나면서 새로운 철기 제조 기술이 유입되는 과정에 해로가 발달함에 따라 조개무지[貝塚]의 규모가 더욱 대형화된다. 아무튼 고조선 유이민의 남하로 청동기 시대 고인돌[支石墓] 사회가 급격히 해체되면서 새로운 질서의 재편 과정은 마한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마한 말무덤의 보고]

마한의 지배자 무덤으로 알려진 말무덤이 군산 개사동신관동, 서수면 관원리에 남아있다. 아직은 말무덤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 성격을 속단할 수 없지만, 봉분의 직경이 10m 내외로 그 기수는 대체로 5기 내외이다. 군산시 내흥동·수송동·신관동·조촌동, 대야면 산월리, 성산면 둔덕리, 서수면 관원리에서 마한의 움무덤[土壙墓]·독무덤[甕棺墓]·주구묘[도랑을 굴착한 형태의 분묘]·분구묘[분구를 먼저 조성한 다음 그 안에 매장 시설을 설치하는 무덤]이 조사되었다.

특히 산월리에서는 마한 부터 백제까지의 다양한 고분이 얼마간 거리를 둔 상태로 자리하여 군산 지역 묘제의 변천과정을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 군산 지역의 주구묘는 대부분 구릉지 혹은 산자락의 정상부에 자리하여 충남 서천군과 함께 금강 하류 지역의 강한 지역성이 입증되었다. 마한의 묘제인 분구묘는 영산강 유역의 대형 분구묘와 직접 관련된 것으로 수송동 축동 유적에서 최고위층의 무덤과 관련된 분주토기(墳周土器)가 출토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주구묘와 분구묘 등 마한의 무덤이 함께 조사됨으로써 당시 군산에는 다양한 세력 집단들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백제의 진출과 행정 치소]

삼국 시대 때 군산은 마한의 영토에서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되었으며, 그 시기는 온조왕 대라는 기록과 달리 4세기 중엽의 근초고왕 대로 추정된다. 근초고왕의 남진 정책에 따라 군산을 포함한 전라북도의 서부 지역 일대가 백제에 정치적으로 복속되어 마한의 지배자 무덤이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닌가 싶다. 바꾸어 말하면, 마한의 말무덤이 전라북도 동부 지역의 가야계 중대형 고총이나 영산강 유역의 대형 고분으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모두 일시에 자취를 감춘다는 사실이다.

『삼국 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군산은 삼국 시대 초부터 본래 백제의 영역으로 시산군과 마서량현, 부부리현의 행정치소가 있었다. 통일신라 757년(경덕왕 16) 행정 구역을 개편할 때 임피군옥구현, 회미현[현재의 회현면]으로 그 이름이 각각 바뀌었다. 임피군옥구현회미현을 비롯하여 함열현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요즘과 달리 삼국 시대 때는 현재의 군산시 임피면이 군산에서 정치·경제·행정의 중심지를 이루었으며, 군산시 회현면 일대에도 독립된 백제의 행정 치소가 있었다.

[삼국 시대 유적과 유물]

군산시 조촌동·신관동·내흥동, 성산면 여방리·도암리, 옥구읍 옥정리, 나포면 장상리, 대야면 산월리, 옥산면 당북리, 서수면 관원리에서 백제 고분이 조사되었다. 특히 산월리마한이 백제에 어떻게 복속되었는가와 당시의 사회상을 밝히는 데 좋은 고고학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여방리에서 은제 팔찌와 순금제 화판장식, 조촌동에서 금동제 귀고리, 산월리에서 6점의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가 출토됨으로써 군산의 위상을 높여 주었다.

군산 일대에 지역적인 기반을 둔 토착 세력집단은, 백제가 도읍을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겨진 이후, 군산이 백제의 대내외 관문지로서 그 역할이 높아지게 됨에 따라, 이를 발판으로 백제의 중앙 세력과 긴밀한 교류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군산과 그 주변지역에 밀집 분포된 관방 유적과 분묘 유적이 그 개연성을 증명해 준다. 삼국 시대 때 군산은 소금 생산 등 해양 경제와 그물 조직처럼 잘 갖춰진 교역망을 발판으로 해양경제의 중심지이자 전략상 요충지로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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