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B030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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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경호 |
[가난했던 어린 시절]
이응수[1961년생] 씨는 6남매 중 넷째로,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원터마을은 교통도 불편하고 토질도 좋지 않아 먹고사는 것이 무척이나 힘든 동네였다.
부모님께서는 마을의 산을 개간하여 누에를 먹였다. 나락농사는 양식을 하는 정도였고, 양잠을 통해서 겨우 현금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양잠을 통해서 6남매를 제대로 교육시킬 정도는 아니어서 큰형님과 작은형님은 중학교 정도를 겨우 졸업하고 외지로 돈을 벌러 나갔다.
이응수 씨의 어린 시절은 배고픈 기억밖에 없다. 특히 어릴 때 양식이 별로 없어 국수를 많이 먹었는데, 국수가 먹기 싫어 도망갔던 기억이 지금도 종종 난다.
[급장까지 했던 초등학교 시절]
이응수 씨의 집은 초등학교와 가까웠다. 그래서 공부하다가 점심 먹으러 집에 오고, 종소리를 듣고 다시 학교로 가는 등 나름대로 편하게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멀리 산을 넘어오는 친구들에 비하면 호강을 한 셈이다.
초등학교 시절 4학년 때까지는 급장도 했다. 친구들에 비해 힘도 세고 활발하다 보니 선생님께서 급장을 시켰던 모양이다.
“그때는 공부가 아니라 싸움이라, 싸움 잘하면 급장시켰어요. 하하.”
하지만 4학년 이후부터는 아버지가 중풍으로 일을 하기가 힘들어지자 아버지가 하던 일을 대신해야 했기에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그때부터는 일밖에 안 했어요. 질리도록 일을 했어요. 공부할 시간은 없었죠.”
[고등학교 시절 가출 사건]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응수 씨는 김천중앙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일 때문에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
“1년에 결석을 사십 며칠씩 했어요.”
게다가 사춘기 시절이라 매우 반항적이었다. 친구들과 싸움도 많이 하고 사고를 많이 쳤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몇몇 친구들과 부산으로 가출도 했다.
“저는 부산으로 가서 중국집 배달 일을 했어요. 한 놈은 공장 들어가고, 한 놈은 중국집 배달 가고, 한 놈은 고무대야 만드는 공장에 갔어요. (중략) 그때 지내던 방에는 빈대가 득실득실했어요. 엉망이었죠. 세상이 귀찮았어요. 세상이 싫어서 그래서 가출을 한 거야. 그러다가 친구 형님 중에 목사 하시던 분이 우리를 잡으러 왔어요. 부산까지. 사십여 일 만에 잡혀 왔어요. 하하. 그래서 세 명이 잡혀서 학교로 들어가는데, 학교 애들이 박수치고 난리가 났어요. 마치 큰일 치르고 온 사람 환대하듯이 말이죠. 하하.”
그렇게 가출까지 하고 수업도 많이 빠졌지만 이응수 씨는 다행히 고등학교는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동생들 공부시키기 위해 ‘먹통차’를 타다]
이응수 씨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나서 외지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많았다. 게다가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여동생 둘이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뭔가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여하튼간에 학업을 시켜야 하니까. 잠깐 동안 ‘먹통차’라고 화물 싣고 댕기는 시커먼 ‘먹통차’를 한 1년 정도 탔어요.”
그러다가 서울 가서 선반 작업도 좀 해 보고 그렇게 ‘사회물’을 맛본 후 이응수 씨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사실은 고향에서 방위 근무를 하기 위해 돌아온 것으로, 집 근처에서 근무를 하다 보니 농사도 짓고 어머니도 돌볼 수 있어 좋았다고 한다.
당시 이응수 씨는 부대원들과 함께 농사일도 했다고 한다. 마침 동네에 갈포벽지 공장이 있었는데, 공장에 아가씨들이 많았다.
그래서 방위부대에 근무하는 동료들이 아가씨들을 보기 위해 일부러 이응수 씨가 사는 동네를 가자고 조르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농민회 활동에서 마을의 젊은 일꾼, 이장으로 살다]
그렇게 방위를 마친 후,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으려는 무렵 이응수 씨는 대학에 다니는 친구와 선배들이 권유하여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하면서 농민 운동을 하게 되었다. 그때 나이 23세 때로, 가톨릭농민회에 정식으로 가입하고 나서는 다른 사회 활동 중에서 자율소방대 활동을 빼고는 농민회 활동에 주력했다. 전국적으로 농민회 집회에는 다 참석하고 다니다 보니 가족들을 포함해 마을 어른들과 많은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또한 농민회 활동을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 정작 농민으로서의 생활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94년부터 이응수 씨는 외부 활동을 접어 두고 마을 이장을 맡기 시작했다. 당시 마을에는 50세 이하의 청년회 조직이 있었다. 이 조직에서 이제는 마을을 젊은 사람들이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우여곡절 끝에 이응수 씨가 이장 직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34세밖에 되지 않은 젊은 사람이 이장을 맡자 달가워하지 않는 마을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젊은 이장이 소신껏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는, 나중에는 계속해서 이장을 맡아 달라는 얘기도 나오게 되었다. 그렇게 되어 이응수 씨는 1994년에서 1997년, 1999년에서 2003년, 그리고 2008년에서 지금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이장 직을 맡아 오고 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