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A020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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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송기동 |
[대나무 밭 기와집의 정체]
개령초등학교 를 끼고 돌아 계림사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동부리에서 양천리로 넘어가는 뒷고개[일명 말랑고개] 아래에 고풍스런 기와집 한 채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보인다.
오랜 세월 대나무 밭에 들어앉아 음침스럽기 짝이 없던 이 집은 2008년 말 비로소 주변에 있던 대나무들을 걷어내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나무 숲을 따라 난 마당을 가로지르면 정면 4칸, 측면 3칸의 기와집이 나오는데, ‘내신정(來新亭)’이란 현판이 자못 근엄하다.
중앙에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넣었는데, 세월의 풍상을 견디기 힘든 듯 문짝과 벽채가 모두 떨어져 나갔다. 마당에는 수령을 가늠하기 어려운 배롱나무 두 그루가 섰고, 발 아래로 펼쳐진 동부리의 뒤태가 새삼 고즈넉하다.
내신정은 충효로 대표되는 유교 질서를 준수하고 인륜의 덕목을 강조하는 개령 현민들의 자치 규약을 관리하는 향약소였다.
특히 덕업상권(德業相勸)[덕을 서로 권한다], 과실상규(過失相規)[잘못된 일은 서로 고쳐준다], 예속상교(禮俗相交)[좋은 풍속은 서로 나눈다], 환난상휼(患難相恤)[어려움에 처하면 서로 돕는다]을 근본으로 삼아 향민들이 이를 준수하도록 교화하는 역할을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물리적인 방법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사적인 처벌을 엄격히 금했던 조선 사회에서조차 유교 질서와 인륜을 준수하려는 향약소의 자치 활동만은 묵인해 주었던 것이다. 아래의 사례는 동부리 주민이자 내신정 관리를 책임진 홍순채[1926년생] 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내신정의 활동상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1912년 내신정 마당]
“아이고, 어르신. 살려주십쇼.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동부리 관학산 뒷자락에 자리한 향약소 내신정이 아침 댓바람[새벽]부터 시끌벅적하다.
“너 같은 놈은 혼찌검이 나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여보게들 저놈을 멍석에 말아 정신을 차릴 때까지 혼을 내줌세.”
개령 관아 호방을 지낸 홍 아무개 둘째 아들 길동이 연일 만취하여 마을 부녀자를 희롱하고 늙은 아버지를 봉양치 않아 원성이 자자하자, 내신정 도약장 허석(許襫)이 장정들을 보내 동부리 옥전골에 사는 길동을 붙잡아 오게 했던 것이다.
“아이고, 나 죽네. 살려 주이소”
길동의 비명 소리가 동부리 하늘을 진동했지만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내신정에서 개령 관아와 개령향교에 미리 연통을 넣어 두었던 것이다.
넋이 반쯤 나간 길동이 멍석에서 기어 나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자,
“이놈, 우리 동부리를 욕보이지 말고 당장 마을을 떠나거라!”
하는 호통 소리가 내신정을 들썩이게 한다.
“아이고 어르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술도 끊고 아비를 지극으로 봉양할 터이니 한 번만 기회를 주시이소.”
도약장(都約長)[향약소 우두머리] 허석은 좌우로 늘어선 부약장과 총무를 번갈아 돌아본 후 고개를 끄덕이더니, 못 이기는 척 각서를 반아 든 후 길동을 풀어 주었다.
[내신정의 역사]
내신정의 공식 문서라 할 수 있는 『개령향약안(開寧鄕約案)』에는 감문면 탄동마을에 거주하는 해주정씨 정각이 향약안 서문을 지었으며, 동부리 출신으로 부제학을 지내고 1904년 낙향한 허석이 이용우 등의 향중 선비들과 상의하여 향약을 정비했다고 적고 있다. 여기에 따르면, 처음에는 향사당을 향약소로 이용했는데, 1912년에 퇴락한 내신정을 현 위치에 지어 향안과 약안을 함께 보관했다는 것이다.
『개령향약절목』에는 향약소의 임원으로 오늘날 회장에 해당하는 도약장과 부약장, 향직월, 총무, 장재 각 1명씩을 두었다고 나와 있다. 기록에 나타난 도약장으로는 이한룡[1951년], 이종우[1952년], 이규승[1953년], 최재수[1955년], 이희범[1957년], 이규하[1959년], 박철하[1961년], 정원[1979년] 등의 이름이 보이며, 회원에 해당하는 좌목[약원]이 초창기에 100명에 달한 적도 있다고 한다. 개항기까지 활발하게 전개되던 내신정의 활동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희미해지더니, 1960년대 이후 거의 활동이 중단된 상태다.
“사람이 없어. 전에는 대를 이어서 회원을 물려받곤 했는데 수십 년 전부터 전부 도회지로 떠나고 누가 있어야지.”
할아버지 홍재옥의 뒤를 아버지 홍종록이 잇고, 그 뒤를 또 이어 3대째 내신정에 이름을 올린 동부리 주민 홍순채[1926년생] 씨는 요즘 걱정이 많다. 이웃하고 있으면서도 최근 용도도 없이 방치되면서 대나무 밭 속에서 점차 무너져 가고 있는 내신정을 보면 억장이 무너진다고 했다.
1912년 건립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거의 허물어져 가던 내신정은 1998년과 2001년 경상북도의 지원으로 말끔하게 중수가 된 적도 있었으나 또다시 돌보는 이가 없어 흉물로 방치되고 있다.
“지금 보기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보이지만 건물 껍데기만 보면 안 돼. 우리 조상들이 저짝에서[저곳에서] 뭘 하실라고 했는지 그분들의 정신을 새기야 돼.”
처마 턱밑까지 파고든 대나무 뿌리를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는 노신사의 눈빛이 못내 안타깝기만 하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