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8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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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渫 |
영어음역 | Gim Hongdae |
이칭/별칭 | 정보(淨甫),남와(南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손경희 |
출생 | 158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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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 1612년 |
몰년 | 1651년 |
추모 | 1804년 |
출생지 | 충청남도 대덕군 회덕면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광명리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강곡리 |
묘소 |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 용호리 |
서원 |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강곡리 |
성격 | 의병장 |
성별 | 남 |
[정의]
조선 후기 김천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정보(淨甫), 호는 남와(南窩). 할아버지는 김천도찰방을 역임한 강부(姜符)이고, 아버지는 군자감 참봉 강해로(姜海老)이다. 어머니는 고성 이씨이다. 아들로 강여구와 강여호를 두었다.
[활동 사항]
강설(姜渫)[1583~1651]은 1583년(선조 16) 지금의 충청남도 대덕군 회덕면에서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요체를 터득하고 학문이 높아 사림이 추중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한 후 1616년 대과에 응시하러 상경하던 중 과거 시험장이 부정으로 얼룩졌다는 소문을 듣고 “과거가 사람을 욕되게 한다. 청백리의 후예로서 시험에 응할 바가 아니다.”라며 그 길로 향리로 돌아와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1625년(인조 3) 모친상을 당하여 여묘(廬墓)하였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에 창의(倡義)하여 성이 함락되자 고향에서 김산 기동[현 김천시 구성면 광명리]으로 은거하였다가 뒤에 강평[현 김천시 조마면 강곡리]으로 다시 옮겼다. 1634년(인조 12)에는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김산향교의 명륜당과 대성전을 중수하는 데 주역으로 일하였으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작고하였고, 유훈을 받은 아들이 뜻을 이루었다.
[묘소]
묘소는 김천시 감천면 용호리 복호동 고당산 자락에 있다.
[상훈과 추모]
강설의 아들들이 김산향교의 중수를 마침으로써 향교의 면모를 일신해 김천의 흥학(興學)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들 부자의 문덕을 추앙하던 안동 병산서원장 이제를 비롯한 영남 유림 555명의 발의로 1804년(순조 4) 김천시 조마면 강곡리에 자동서원(紫東書院)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