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7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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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始昌 |
영어음역 | Gim Sichang |
이칭/별칭 | 정양(廷揚),남정(嵐亭),효절(孝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병우 |
출생 | 147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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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 1558년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대룡리 |
묘소|단소 |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신암리 |
사당|배향지 | 충청북도 영동군 모현서원 |
사당|배향지 |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 수원리 송계서당 터 |
사당|배향지 | 경상북도 김천시 성내동 경렴서원 |
정려 |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신암리 662 |
성격 | 유학자 |
성별 | 남 |
본관 | 해풍(海豊) |
[정의]
조선 전기 김천 출신의 유학자.
[가계]
본관은 해풍(海豊). 자는 정양(廷揚), 호는 남정(嵐亭). 할아버지는 사직(司直) 김효신(金孝信)이고, 아버지는 김의(金顗)이며, 어머니는 하산 조씨(夏山曺氏) 조승중(曺承重)의 딸이다.
[활동 사항]
김시창(金始昌)[1472~1558]은 지금의 김천시 대항면 대룡리에서 태어났으며, 평생 김천을 떠나지 않았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고, 『가례(家禮)』에 의한 상례(喪禮)를 철저히 준행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묘 옆에 여막을 짓고 3년간 묘소를 지켰으며, 성종과 중종이 승하하였을 때 제례를 극진히 하여 신하로서의 예를 다하였다. 인종이 승하하자 70세의 노구임에도 복례(復禮)에 어긋남이 없었다. 그의 효행과 충절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삼강록(三綱錄)』에 수록되었다.
김시창의 학문은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나 낙방한 후 사환(仕宦)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청렴한 지조로 처신하며, 마음가짐이 구차하지 아니하고 조행(操行)이 단정하면서 재주까지 겸하였다. 1518년(중종 13) 경상도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현량과에 천거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김종직과 조위(曺偉) 등이 이끄는 영남 신진 사류의 중심인물이었으나, 조광조(趙光祖)가 기묘사화로 세상을 떠나자 두문불출하여 명리(名利)에 초연함을 보였다.
[묘소]
묘소는 김천시 봉산면 신암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조정에서 사후 김시창에게 참봉을 증직하였으며, 효절(孝節)이란 시호를 내리고 정려하였다.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신암리 662번지에 김시창 효절각이 있다. 황간(黃澗)[충청북도 영동의 옛 지명]의 모현서원(慕賢書院)과 송계서원(松溪書院), 김산의 경렴서원(景濂書院)에 제향되었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은 김시창의 충효가 만인의 본이 된다고 찬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