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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475
한자 壬辰倭亂
영어음역 Imjin Waeran
영어의미역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이칭/별칭 임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호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1592년연표보기
종결 1598년연표보기
발생|시작 장소 경상북도 김천시
종결 장소 경상북도 김천시
성격 전쟁
관련 인물/단체 황응남|김준민|이형|곽준|문위|이수광|양사준|정기룡|김수|장지현|장효현|서예원|여대로|권응성|박이룡|강절|김시민|정유한|이우빈|모오리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개설]

4월 13일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군은 한양을 함락하기 위해 교통로를 따라 빠르게 진격하였다. 구로다 나가사마[黑田長政]가 이끄는 우로의 왜군은 무계~성주~개령을 거쳐 4월 25일 교통의 요지인 김천역에 도착하였다. 김천역을 지키던 우방어사 조경(趙儆)과 조방장 양사준이 적을 맞아 싸웠으나 패배하여 조경구성면 상좌원으로 피했다. 왜군은 김산에서 합류하여 금령평야에 진을 쳤다.

성주에 머물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왜장이 6월 12일 개령으로 옮기고, 이곳에 왜군 후방 사령부를 설치하여 주변을 공략하는 거점으로 삼았다. 고령의 김면(金沔) 등의 의병이 일어나 왜군을 공격하자 개령·김산 등지에서도 의병이 일어나 왜적을 무찔렀다. 김천에서 일어난 주요 전투로는 김천역 전투, 추풍령 전투, 우두령 전투, 지례 전투, 석현 전투, 공자동 전투 등이 있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부산포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왜군의 주력 부대는 좌·중·우로로 나누어 한양을 향하였다. 좌로는 동래~기장~좌수영~울산~경주~영천~의흥~군위~문경이며, 중로는 동래~양산~밀양~청도~경산~대구~인동~선산~상주, 우로는 동래~김해~창원~영산~창녕~현풍~성주~지례~금산~추풍령~영동~청주~경기도이다.

삼로로 나누어 북진한 왜군은 5월 3일 한양을 함락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의 왜군이 한양의 함락을 위해 교통로를 따라 빠르게 진격함으로써 왜군의 진격로를 제외한 다른 지역이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으므로 의병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고, 이들에 의한 왜군의 전후방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왜군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한양에 집결한 왜군은 총대장이 되어 한양에 주둔하고 8도를 분담하여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경상도를 분담한 모리 데루모토는 5월 10일 현풍에, 18일 성주에 침입하였고, 6월 12일 개령으로 옮기고, 이곳에 왜군 후방 사령부를 설치하여 주변을 공략하는 거점으로 삼았다. 이로써 개령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왜군과 의병 사이에 전개되었다.

[경과]

경상북도 지역을 장악한 왜장 모리 데루모토는 개령현에 주둔하여 왜군 후방 사령부를 설치하여 경상도 일원의 치안을 담당하면서 군정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견고한 이중 목책을 구축하고 개령의 백성 700~800명을 목책 내에 가두어 온갖 사역에 동원하였다. 이에 맞선 김천의 의병의 창의를 살펴보면, 기동[구성면 광명리]에서 여대로(呂大老)가 처음에는 가동(家童)과 마을 장정 30여 명을 의병으로 모집하고 곡산에서 군량미를 풀자 5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조마면 장암리권응성(權應聖)여대로와 사돈 간인데 함께 전쟁에 참여하여 왜군을 무찔렀다. 황간에서 창의한 박이룡(朴以龍)은 하로[양천동]에 500명의 군진을 설치하여 활약하였고,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면은 총의병대장으로 활동하면서 개령의 왜군을 구축하다가 과로로 인해 병을 얻어 순국하였다.

개령에 왜군이 주둔하자 6월 22일, 여대로가 초유사 김성일(金誠一)과 토벌 방략을 협의하였다. 이때 김성일의 추천으로 인해 여대로가 지례현감으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천을 두고 왜군과 의병 사이에 몇 차례의 전투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전투는 다음과 같다.

김면정인홍(鄭仁弘)이 이끄는 의병이 성주성을 포위하였지만 개령의 왜군이 내원하여 김면은 지례로 진을 옮겨 적의 거창 침입을 막았다. 7월 17일 지례·김산의 왜군이 거창을 향한다는 정보에 따라 김면이 2,000명의 의병으로 우치현[우두령]에서 왜군을 격파하였고, 7월 29일 무풍에서 퇴각한 왜적이 지례향교 창고에 들자 이를 포위하여 여대로·권응성 등이 김면과 함께 지례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9월 초순 초유사 김성일의 주선으로 진주의 김시민(金時敏)이 김산으로 왔으며 세 차례의 전투 끝에 공자동을 탈환하였다. 11월 25일 김면이 이끄는 의병 등이 석현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처럼 개령에 주둔한 왜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의병들이 끊임없이 공격하자 이듬해 1월 26일경에 개령의 적이 반수나 철병하였다. 그리고 2월 12일 명군의 남하 소식을 들은 왜군은 완전 철수하였다.

[결과]

개령의 왜군이 완전 철수하였지만 왜군의 진영에 갇혀 있던 개령 백성 300여 명이 살해되고 400명이 풀려났다는 기록에서 보다시피 개령을 비롯한 김천 지역은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다. 왜군이 철수한 1593년 2월 12일 지례현감 여대로, 개령현감 최기준이 하로에 진을 친 김면 의병총대장을 만나 개령의 수습책을 논의했다. 이후 김면은 왜적을 소탕하다가 하로 군진에서 병으로 순직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7.19 2011년 한자 최종 검토 작업 1) 성주에 머물던 모리 왜장이 ->성주에 머물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왜장이 2) 경상도를 분담한 모오리[毛利輝元]는 5월 10일 현풍에 경상도를 분담한 모리 데루모토는 5월 10일 현풍에 3) 경상북도 지역을 장악한 왜장 모오리는 개령현에 주둔하여 경상북도 지역을 장악한 왜장 모리 데루모토는 개령현에 주둔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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