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1523 |
---|---|
한자 | 李祥李士哲孝子門 |
영어공식명칭 | Memorial Monument House for the Filial Piety of Yi Sang,Yi Sachul |
이칭/별칭 | 이상·이사철 효자 정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 봉소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학로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769년 - 이상·이사철 효자문 중수 |
---|---|
현 소재지 | 이상·이사철 효자문 - 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 봉소리 |
원소재지 | 이상·이사철 효자문 - 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 봉소리 |
성격 | 효자 정려 |
양식 | 겹처마, 맞배지붕의 익공식 |
정면 칸수 | 1간 |
측면 칸수 | 1간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 봉소리에 있는 조선 시대 이상·이사철의 효자 정려.
[개설]
이상(李祥)은 본관이 신평(新平), 호는 덕계이다. 여덟 살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서 7년간이나 머물러 있는 동안에 부모를 그리워하는 효심에 감동한 왜인이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고 전한다. 이상은 고국에 돌아온 지 1년 만에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 후 벼슬길에 올라 이조 정랑, 호조 판서, 성균관 예문관사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상은 부모 섬기기를 생의 보람으로 생각하고 부모를 떠나서는 밖에서 자고 오는 일이 없었으며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부모가 병이 들자 세 차례나 벼슬에서 물러나 부모를 모셨으며, 부모가 죽자 6년간 시묘하였다. 이상의 효행을 기려 세종(世宗)이 정문을 내렸다.
이사철(李士哲)은 이상의 8대손이다. 어머니가 병들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더 살 수 있도록 했고, 어머니가 사망하자 죽만 먹으면서 3년간 시묘하였다. 인조 때 이사철에게 정려를 내렸다. 두 정문이 한 마을에 함께 있어서 사람들이 마을을 ‘효자동’이라고 불렀다 전한다.
[위치]
순성초등학교에서 면천행 군도를 따라 50m 거리 오른쪽 도로변에 있다.
[변천]
15세기 세종 때 이상 정려를, 17세기 인조 때 이사철 정려를 건립하였다. 1769년(영조 45)에 중수하였다.
[형태]
정려각은 쇠살로 울타리를 둘렀다. 시멘트 기단 위에 팔각의 주춧돌을 놓고 둥근기둥을 세웠다. 하방까지는 시멘트로 마감했고 그 위에 사면을 홍살로 둘렀다. 정려각은 정면과 측면 각 1간으로 맞배지붕의 익공식(翼工式) 가구이다. 각 간의 창방 위에는 화반(花盤)[초방 위에 장여를 받치기 위하여 끼우는 널조각], 대공[들보 위에 세워서 마룻보를 받치는 짧은 기둥]을 설치하였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박공 밑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정각 안에는 천정의 중앙에 현액이 걸려 있다. 애초에 지은 연대는 알 수 없고 중수한 연대는 1769년(영조 45)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액 오른쪽에는 중수기가 있는데 판독할 수 없고, 왼쪽 벽에도 다른 현액이 걸려 있는데 이상과 이사철의 효자문임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당진에 관향을 둔 대표적인 씨족인 신평 이씨(新平李氏)의 효자 정려로, 향촌 사회에 미치는 가문의 영향력을 알 수 있게 한다는 점에 의미를 둘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