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6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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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延安車氏 |
영어공식명칭 | Yeonan Chasi|Yeonan Cha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남석 |
입향 시기/일시 | 1790년경 - 연안차씨 당진 입향조 차건의 입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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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연안(延安) - 황해도 연안 |
입향지 | 연안차씨 당진 입향지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적서리 |
세거|집성지 | 연안차씨 당진 세거지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적서리 |
묘소|세장지 | 연안차씨 당진 세장지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적서리 |
성씨 시조 | 차효전(車孝全) |
입향 시조 | 차건의(車乾義) |
[정의]
차효전이 시조이고 차건의가 입향조인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연안차씨(延安車氏)는 황해도 연안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다. 시조 차효전(車孝全)은 고려의 개국공신이다. 연안차씨는 당진시에 세거지를 형성하며 거주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집성촌이 대호지면 적서리의 오산공파 후손들이다. 이들은 문원사(文苑祠)를 건립하여 차천로(車天輅)[1556~1615]의 영정을 봉안하고 제향하면서 차천로의 학문과 사상을 기리고 있다.
[연원]
연안차씨의 씨족사는 연원이 길다. 고조선과 연결되어 중국에서 들어왔고, 우리나라 성씨로 자리 잡았다고 전한다. 하지만 본격적인 차씨의 시작은 고려 태조 왕건에서 비롯된다. 고려의 개국공신 류차달(柳車達)의 장남 류효전(柳孝全)에게 차씨 성을 하사하고 대광백(大匡伯) 연안군(延安君)에 봉했으며, 둘째 아들 류효금(柳孝金)에게는 소윤(少尹)의 벼슬을 내리고 문화군(文化君)에 봉하여 류씨 성을 계승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차효전(車孝全)이 연안차씨의 득관 시조가 되었다.
연안차씨는 고려 시대에 대를 이어가며 고위 관직을 차지하였던 문벌 귀족이었다. 또한 고려 말에는 차수하(車受河) 이후 차원부(車原頫)까지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차원부는 성리학에 정통하여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당대에 명유로 일컬어졌는데 고려 말 정국이 혼란해지자 평산의 수운암동(水雲巖洞)에 은거하였다. 『차원부 설원기(車原頫雪冤記)』에 따르면 차원부가 은거하는 곳에 이성계가 찾아와 자신의 혁명 계략을 설명하였다. 이에 차원부는 극구 만류하며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제지하였으나, 정도전이 보낸 군사에 의해 참살되고 말았다. 이를 늦게 알게 된 이성계는 차원부에게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추증했고 문절공(文節公)이란 시호도 내렸다.
연안차씨는 차식(車軾)[1517~1575]에 의해 중흥되었다. 차식은 중종 때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평해 군수를 역임했고, 경사(經史)와 학문이 뛰어났다. 화담 서경덕의 문인으로 문명을 떨쳤던 차천로는 차식의 아들로 1577년(선조 10)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개성 교수를 지냈고, 1589년 통신사 황윤길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차천로는 일본 체류 기간에 4,000~5,000수의 시를 지어 일본인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광해군 때 탄핵을 받아 전북 익산 웅포에 은거하면서 『강촌별곡(江村別曲)』 등의 가사를 짓기도 하였다. 차천로는 시에 능하여 한호(韓濩)의 글씨, 최립(崔岦)의 문장과 함께 ‘송도 삼절’이라 일컬어졌고, 아버지 차식, 동생 차운로(車雲輅)와 함께 세상 사람들으로부터 ‘3소(蘇)’라 불렀다.
근대에는 포우단(砲牛團)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전개한 차도선(車道善), 『대동공보(大同共報)』를 창간한 독립운동가 차석보(車錫甫),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 위원인 차리석(車利錫)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입향 경위]
차천로의 증손자인 차건의(車乾義)가 1790년(정조 14)경 아들 3형제를 데리고 대호지면 적서리에 낙향하였는데, 입향 경위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현황]
차천로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적서리 오산공파 연안 차씨는 100여 호에 달하는 적서리 주민의 80% 이상을 차지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었으나 현대에 이르러 그 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차천로를 제향하는 ‘문원사’를 중심으로 가문의 유대와 결속을 강화하면서 차천로의 학문과 정신을 계승해 오고 있다.
당진에는 적서리의 연안차씨 오산공파 외에도 당진시 대호지면 조금리에 차원부의 조카인 강렬공(剛烈公) 차운혁(車云革)의 후손들이 강렬공파를 이루며 50여 세대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또한 당진읍 수청리·읍내리·우두리에는 차천로의 동생인 창주공(滄州公) 차운로의 후손들이 창주공파를 형성하며 집성촌을 이루어 60여 세대가 살고 있다.
[관련 유적]
연안차씨는 문원사를 건립하여 차천로의 영정을 봉안하고, 매년 음력 11월 15일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또한 경주 김씨 효열비(慶州金氏孝烈碑)는 당진시 대호지면 적서리 ‘뱃말’ 마을에 있는 비석이다. 경주 김씨는 대호지면 적서리에 거주하던 차숙보(車淑輔)의 며느리로, 남편이 죽은 뒤에도 시부모를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며 남편을 대신해 인천을 왕래하다가 해난 사고로 사망하였다. 대호지면 적서리 진흥회에서 1942년 경주 김씨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효열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