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5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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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璜 |
영어공식명칭 | Yoon Hwa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남석 |
묘소|단소 | 윤황 묘소 - 충청남도 당진시 시곡동 윗귀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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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충신 |
성별 | 남 |
본관 | 남원(南原)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에 묘소가 있는 고려 말 충신.
[개설]
윤황(尹璜)[?~?]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시기의 문신이다. 조선이 건국하자 출사하기를 거부하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았다. 충청남도 당진으로 낙향하여 사망하자, 태종이 무학 대사를 보내 장지를 정해 주었다고 전한다. 현재 서산 송곡향사에서 윤황을 배향하고 있으며, 당진의 묘소 앞에는 신도비가 있다.
[가계]
윤황의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호는 후송(後松)이다. 할아버지는 합문지후(閤門祗候) 윤영찬(尹英贊)이고, 아버지는 도평의록사(都評議錄事)를 지낸 윤수균(尹守均)이다. 부인은 이요필(李堯弼)의 딸 신평 이씨(新平李氏)다.
[활동 사항]
윤황은 고려 말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으며, 고려가 망하자 송악(松嶽)[현 개성]에 숨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다짐하였다. 이때 호를 후송(後松)이라 지었다. 태종이 윤황의 집에 찾아가 관직에 나오기를 권고하였지만 윤황은 예의를 다해 사양하고 엎드려 절하지 않았고, 태종은 윤황이 끝내 절개를 꺾지 않을 것이라 여겨 돌아갔다고 전한다. 그 후 윤황은 당진의 해안가로 낙향하여 거주하다가 사망하였다. 현재 후손들이 충남 당진시 시곡동에 거주하고 있다.
[묘소]
윤황의 묘소는 충청남도 당진시 시곡동 ‘윗귀밀’에 있다.
[상훈과 추모]
윤황이 죽자, 태종은 무학 대사를 보내 장지를 당진현 공정리(公井里)[현 당진시 시곡동]로 정하게 하였다. 그 후 1797년(정조 21)에 지역의 선비들이 윤황을 서산 송곡향사(松谷鄕祠)에 배향하였으며, 1798년(정조 22) 조정에서는 윤황의 절의를 기려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윤황의 묘소 앞에는 1934년 12월에 15대손 윤익현(尹翊鉉)이 짓고 18대손 윤인섭(尹寅燮)이 글씨를 쓴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두전(頭篆)은 ‘고려 전서 충간공 후송 남원 윤선생 신도비명(高麗典書忠簡公後松南原尹先生神道碑銘)’이다. 가첨석을 포함한 신도비의 전체 높이는 197㎝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