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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568
한자 安致和
영어공식명칭 An Chihwa
이칭/별칭 정숙(正淑),성재(誠齋),소절(昭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반촌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42년연표보기 - 안치화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76년 - 안치화 사마시 급제
몰년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안치화 사망
출생지 안치화 출생지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連山)
묘소|단소 안치화 묘소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반촌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순흥(順興)
대표 관직 석성(石城) 현감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에 묘소가 있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신.

[개설]

안치화(安致和)[1542~1592]는 조선 선조 때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용인(龍仁) 전투에서 순절한 충신이다. 안치화의 후손들은 소절공파(昭節公派)이며, 강원도 원주시와 충청남도 논산시에 세거지를 이루고 있다.

[가계]

안치화의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정숙(正淑), 호는 성재(誠齋)이다. 고려 시대 학자 안향(安珦)의 11세손이며, 이조 판서를 지낸 안호의(安好義)의 둘째 아들이다.

[활동 사항]

안치화는 1576년(선조 5) 사마시에 급제한 후, 아산(牙山)·정산(定山)·석성(石城) 현감을 지냈다. 안치화는 부임하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고 전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석성 현감이었던 안치화는 충청 병사의 휘하에 들어가 의병을 규합하고 관군을 정비하여 여러 곳에서 공을 세웠다. 하지만 용인 전투에서 적에게 사로잡히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안치화의 아들 3형제는 아버지의 충절을 가문의 정신으로 계승하였다. 안치화의 맏아들인 주부(主簿) 안홍복(安弘福)은 아버지가 순절하자 가솔을 이끌고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사흥에 정착했다. 안홍복의 자손은 천여 명이 넘도록 번성하였고, 전국에 흩어져 거주하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둘째 아들인 안홍록(安弘祿)은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으로 1589년(선조 22)에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통정 대부 행남대 장령(通政大夫行南臺掌令)을 거쳐 금산 군수(金山郡守)와 전주 판관(全州判官) 등을 역임했다. 안홍록의 후손들은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동·연무읍·은진·가야곡·추부·성동면 등에 세거지를 이루고 있다. 셋째 아들인 안홍우(安弘祐)는 1590년(선조 23)에 성균관 생원이 됐으나 출사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후손들은 충청남도 논산시 벌곡면 신양·사정·한삼천리, 연산면 덕암리 등지에 동족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묘소]

안치화의 묘소는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반촌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안치화가 순절한 뒤 조정에서는 가선 대부 병조 참판(嘉善大夫兵曹參判)에 추증하고 소절(昭節)이라는 시호와 함께 충신 정려(旌閭)를 내렸다. 또한 묘소가 있는 당진시 송악읍 반촌리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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