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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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瑜遺墟碑 |
영어공식명칭 | Nam Yu Memorial Stone |
이칭/별칭 | 의천 부원군 남공 유 노량 전적 유허비(宜川府院郡南公瑜露梁戰捷遺墟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충장1길73-54[도이리373-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남기은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52년 - 남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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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598년 - 남유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778년 - 노량 해전 전적지에 남유 유허비 건립 |
보수|복원 시기/일시 | 1987년 9월 - 남유 유허비 재건립 |
현 소재지 | 충장사 경내 - 충청남도 당진군 대호지면 충장1길 73-54[도이리 373-1] |
원소재지 | 의천 부원군 남공 유 노량 전첩 유허비 - 노량 해전 전적지 |
성격 | 공적비 |
관련 인물 |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 |
재질 | 석물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약 70.5㎝[가로]|255㎝[세로]|39㎝[두께]|325㎝[가첨석 포함 전체 높이] |
소유자 | 의령 남씨 충장공파 종중 |
관리자 | 남주현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에 있는 남유의 업적을 기록한 공적비.
[개설]
남유 유허비(南瑜遺墟碑)는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남유(南瑜)[1552~1598]의 공적을 기려 세운 비석이다.
[건립 경위]
남유는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하였다. 군수와 현감을 거쳐 1592년(선조 25) 부평 부사(富平府使)로 재임하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정을 도왔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어머니의 상중이던 남유를 나주 목사(羅州牧使)와 좌영장에 겸직 제수하여 인근 바다에 면한 9읍의 병사를 관할하게 하였다. 남유는 1598년 마지막 해전인 남해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고 승전(勝戰)을 마무리하다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남유가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이후 유허비조차 없었는데, 전라도·경상도·충청도의 뜻 있는 선비들이 왕[정조]에게 상소를 올린 후 왕명을 받은 좌의정 서명선이 글을 지어 유허비를 세웠다.
[위치]
남유 유허비는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충장로1길 73-54[도이리 373-1] 충장사(忠壯祠) 경내 입구 왼쪽에 있다.
[형태]
남유 유허비의 재질은 돌이며 지붕돌이 얹힌 형태이다. 비신(碑身)의 크기는 가로 약 70.5㎝, 세로 255㎝ , 두께39㎝로 가첨석[지붕돌]을 포함한 전체 높이는 325㎝이다.
[금석문]
남유 유허비 비신(碑身)의 전면에는 '의천 부원군 남공 유 노량 전적 유허비(宜川府院郡南公瑜露梁戰捷遺墟碑)'라 내용을 적고 뒷면에는 장군의 업적을 새겨 놓았다. 업적에 대한 내용은 『충장공 남이흥 장군 유사록』에 기록되어 있다.
[현황]
남유 유허비는 처음에는 1778년 남해 노량 해전의 전적지에 건립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에 의해 소멸되었다. 이후 문헌에 있는 것을 토대로 후손들이 뜻을 모아 1987년에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에 재건립하였다. 남유 유허비는 비석의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며 비문도 다른 비석에 비해 크게 새겨져 있다. 또한 비문(碑文) 역시 마모가 거의 없어 육안으로 확인하기 쉽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