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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104
한자 鹽田
영어공식명칭 Salt Field
이칭/별칭 염밭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추윤

[정의]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바닷물을 농축시켜 햇빛과 바람 등으로 소금을 만들기 위하여 자연 증발지로 만들어진 토지.

[개설]

염전은 천일염전, 소금 광산 염전, 소금호 염전, 벌염전, 돌소금 염전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가장 널리 이용되는 천일염전은 바닷물을 햇볕과 바람 등으로 증발시켜 소금을 만드는데, 동남아시아에서 지중해 연안 및 라틴 아메리카까지 널리 분포하고 있다. 염전은 기후 조건과 입지 조건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장소 선정에 제약을 받는다.

[소금에 대한 기록]

양(梁)나라의 도홍경(陶弘景)이 엮었다고 전해지는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 소금이 의약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는데, 약물 중독의 해독제로 소개되었다. 그 밖에 기원전 27세기 재상 숙사씨(宿沙氏)가 처음으로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채취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소금에 관한 기록으로는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 고구려 조에 소금을 해안 지방에서 운반해 왔다는 대목이 있을 뿐이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는 1288년(충렬왕 14) 처음으로 염전에서 세금을 거두었고, 1309년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도염원(都鹽院)을 두어 염분(鹽盆)을 국가에서 관장하여 직접 소금을 제조, 판매하는 전매 제도로 재정 수입원을 삼았다.

우리나라에서의 염전 개발은 부족 국가 시대인 옥저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그 이후 고려,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완만한 변화와 발전을 이어 왔다. 바다에 면하지 않은 충청북도를 제외하고는 예로부터 해안가 도처에서 소금이 제조되어 왔다.

[제염업의 변천]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제염은 1907년 당시 경기도 부천군 주안에서 시도되었다. 근대 산업으로 제염업이 발달된 것은 해방 이후 1950년대부터이다. 일제 시대부터 1950년까지 제염 사업은 관(官) 독점 전매제로 국내 수요량이 부족하여 외국염을 쓰기도 하였다. 그 후 관영 독점 체제를 지양하고 민영 염전 개발을 적극 장려하여 1955년에는 관영 염전 1900정보[18.843㎢], 민영 염전 800정보[7.934㎢]로 늘어나 1960년대에는 소금 생산 과잉으로 염업 정비법을 실시하여 염업의 휴업과 폐염이 속출하였으며 거의 대부분의 염전이 농토로 개답되었다. 1962년에는 전매청에서 완전 민영화되었다.

[염전의 구성]

염전은 염전과 외해를 나누는 방조제 역할을 하는 외제방, 바닷물을 저장해 두는 저수지, 저수지에서 이동해 온 바닷물을 농축시키기 위해 조성된 증발지, 증발지에서 이동해 온 농축 함수를 소금을 채취할 수 있도록 더 농축시키는 결정지, 그리고 비가 오거나 겨울을 대비하여 증발지와 결정지 내의 염도가 높아진 바닷물을 보관하는 덮개가 설치된 웅덩인 함수류, 소금을 보관하는 염퇴장으로 구성된다.

[제염의 증발 방법]

제염의 증발 방법은 자연 증발법과 전오법(煎熬法)으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재래식으로 천일염전에 의한 제염 방법이 중심이고, 전오법은 벌막의 직화열을 주로 이용하는 제염 방법이다.

천일제염이 시작되기 전에는 전오 염전이 발달하였는데, 이 제염법은 조선 시대에 해안 지방에서 주로 행해진 것으로 농축된 바닷물을 바짝 졸여 염을 얻기 위한 재래식 염전을 말한다. 당진 지방에도 해안가 자연 마을에 벌이란 지명이 보이는데, 이 벌막이 전오염을 위해서 불을 때던 곳이다. 이와 같이 전오 염전이 발달한 지역은 해안가 지역으로 판로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당진은 경인 지역, 특히 인천과 배로 연결되어 있으며, 일부는 예산, 천안, 대전 등지로 팔려 나갔다.

당진 서북부 해안 일대에는 갯벌이 넓게 전개되고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커서 전오염을 생산하는 데 유리하다. 또 주위 야산에 송림이 울창하여 땔감 조달이 용이하고 채염 시기인 5~6월에는 강수량도 적어서 전오염이 성했는데, 지금도 벌막이 있던 곳에 화석 지명인 벌 지명이 남아 있다. 석문면 통정리 벌안, 초락도리 안벌, 송산면 유곡리 벌뒤, 가곡리의 목벌, 삼월리의 벌고개, 정미면 염장, 염솔 등이 옛날 벌막이 있던 곳이다.

[당진 지역의 염전]

서해안은 천일제염에 있어서 지형, 지질, 기후 등 채함(採鹹) 활동이 유리하다. 당진도 1970년대까지 신탄이 풍부하고, 맑은 날이 많으며, 해안가에 간사지가 많아서 천일제염에 적합하여 석문면, 송산면, 송악면, 고대면, 신평면 등지에서 소금 생산이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천일제염은 지형이 평탄한 간석지가 필요하고, 하천에 인접되어 있지 않으며 산지가 없어 통풍 상태가 좋아야 한다. 그리고 비교적 강수량과 강수일수가 적으며, 증발량이 많고 일사가 강할 뿐만 아니라 조차가 심하고, 점토와 사질의 분포와 넓은 간석지의 발달 등이 중요시되므로, 염전은 축조에 유리한 자연조건을 지닌 곳에 입지하게 된다. 당진 지역은 이러한 천연 조건을 잘 갖추고 있어서 한때는 염전업이 발달되어 염업 조합까지 있었다.

기록상 당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염전을 찾아보면, 아산시의 600여 년 전 옛 지지책인 『아주지(牙州志)』에 현재 우강면 부장리에 위치했던 우평포의 염전에 대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즉, “우평포는 범근내포 건너에 위치해 있는데 홍주, 면천 사람들이 단결하여 염벌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가 폐염되고 지금에 와서 새로운 염전이 되었다. 근래에는 옥토가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진 지역에서 만들어진 소금은 예전에는 주로 벌막에서 만들어진 전오염이었고 해방 이후에는 천일염이 주류를 이루었다.

당진 지역 최초의 염전은 1965년 신평면 매산리 164-8 외 8필지 총면적 11만 1359㎡[염전 4만 7160㎡, 저수지 5만 8757㎡, 기타 4,992㎡]의 제염장이다. 이 염전을 시발로 송산면 가곡리, 석문면 삼화리, 초락도리 등지에 염전이 개발되었다. 한때 염전이 성업했으나 1991년 석문, 대호 방조제 축조로 석문 지역의 염전은 폐업되었다. 석문면에서는 주로 삼화리, 교로리, 난지도리, 초락도리 등지에서 염전이 있었다.

석문면의 주요 염전 가운데 1974~1987년 사이에 설치되었던 염전을 살펴보면, 교로리에 설치된 염전으로 조춘원 염전[8,506㎡], 김용운 염전[3만 8813㎡]은 1991년 석문 방조제에 편입, 김종은 염전[3만 8829㎡], 김석동 염전[4만 3822㎡]은 1991년 대호 방조제에 편입되어 폐쇄, 난지도리 구본화 염전[20만 4329㎡]은 1997년 양식장으로 전환, 김진경 염전[5만 1572㎡]은 농경지로 편입, 초락도리 김사유 염전[31만 8818㎡]은 1991년 대호 방조제 편입, 교로리 김승유 염전[41만 1877㎡]은 1991년 대호 방조제로 편입되어 폐염되었다.

고대면은 동쪽과 서쪽이 바다와 접하여 긴 해안선과 넓은 바다를 끼고 있으며, 조수 간만의 차가 9m 정도로 커서 넓은 갯벌이 나타나고 일조량이 길고 건조한 계절풍이 불어서 제염업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예전부터 전오염이 발달되었으며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천일제염이 발달되었다. 1960년대 이후 소금 과잉 생산으로 값의 폭락, 인건비 상승으로 인한 수지타산 부족 상태에서 대호 방조제석문 방조제 공사로 바닷물의 유입이 안 되자 답작지로 전환되었다. 고대면의 중요 염전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전오염으로는 슬항리 치더리 염밭[35㏊(0.35㎢)], 대촌리 이화수 염밭[15a(0.0015㎢)], 장항리 이종순 염밭[15a(0.0015㎢)], 천일염으로는 슬항리에 삼흥 염전[5a(0.0005㎢)], 운산 염전[3a(0.0003㎢)], 슬항 염전[2a(0.0002㎢)], 인화 염전[3a(0.0003㎢], 성산리에는 조흥 염전[40a(0.0040㎢)], 당진포리에는 진명 염전[73a(0.0073㎢)], 새섬 염전[25a(0.0025㎢)], 닭미 염전[4a(0.0004㎢)], 왜고개 염전[3a(0.0003㎢)], 상안 염전[3a(0.0003㎢)], 유래 염전[3a(0.0003㎢)], 사동 염전[7a(0.0007㎢)], 장항리에는 긴목 염전[5a(0.0005㎢)]이 있었다.

송악읍은 1950년대 간척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북쪽은 남양만, 동쪽은 아산만, 서쪽은 뒷개, 동남쪽은 말목개 등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곶(串)이었다.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염분농도가 높아 제염업을 하기에 좋은 조건이다. 자염을 하던 곳은 한진리, 복운리, 전대리, 도원리 등에서 시설 규모 10a[0.0010㎢]가량으로 7곳 정도에서 했다. 1951년도에는 근대식 염전이 개발되기 시작하여 1960년대까지 소금 생산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951년도에 구지 염전, 한진 염전, 광양사 등이 먼저 개발되었다. 송악읍의 주요 염전을 살펴보면, 1951년도에 개발된 염전은 정곡리 구지 염전[24.8㏊(0.248㎢)], 복운리 한진 염전[23.9㏊(0.239㎢)], 복운리 광양사 염전[36.3㏊(0.363㎢)]이고, 1952년에 개설된 염전은 한진리 황해 염전[20.7㏊(0.207㎢)], 복운리 대산 염전[11.5㏊(0.115㎢)]이고, 1953년에 개설된 염전은 복운리 부흥 염전[15㏊(0.15㎢)], 고대리 고합사[67㏊(0.67㎢)], 복운리 운천 염전[12㏊(0.12㎢)], 복운리 대동 염전[22㏊(0.22㎢)]이다. 1955년에 개설된 염전은 복운리 송악 염전[12㏊(0.12㎢)], 1956에는 부곡리 영안 염전[4.6㏊(0.046㎢)]이다.

송산면도 남양만과 아산만을 마주보고 있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여 간조 시 개펄이 넓게 전개되고 신탄이 풍부하며 일조 시간이 길어서 소금 생산에 아주 유리하다. 해방 전까지는 자염업이 운영되었으나 해방 이후 식민 제도에서 벗어났고 1950년대에 들어오면서 간척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고미, 삼보, 온양, 숙명, 이화, 영진 등의 염전이 생겨났으나 석문 방조제가 축조된 1992년에 폐업되고, 한성 염전은 1980년 송산 방조제가 완공되면서 폐업되었다. 성구미동곡리에 있던 염전들은 1965년도에 간척 사업으로 이루어진 염전인데 2007년 현대 제철소 공사가 시작되면서 폐염되었으며, 이를 마지막으로 송산면의 모든 염전은 사라졌다. 송산면의 주요 염전은 1955년경에 개설된 가곡리 가동 염전[32.9㏊(0.329㎢)], 1959년에 개설된 가곡리 삼보 염전[33.2㏊(0.332㎢)], 고미 염전[3㏊(0.03㎢)], 1959년에 개설된 가곡리 신영개에 위치한 온양 염전[13.4㏊(0.134㎢)], 이 밖에 동곡리 한성 염전[24㏊(0.24㎢)], 무수리 숙명 염전[41㏊(0.41㎢)] 등이 있었다.

[현황]

토질이 점토 40~50%, 사토 50~60%이고, 지반이 삭망(朔望)의 만조 때 수면보다 2~2.5m 낮은 곳인 우리나라의 서해안은 천일염전을 만드는 데 대체로 적지이다. 해수를 염전 증발지에 입수시키고, 햇빛과 바람 등의 자연의 힘에 의하여 수분을 증발시킴으로써 포화 함수에서 침전되는 결정체를 얻는 것이 천일염전에서 제염법이다. 우리나라의 천일염 생산 시기는 4~10월이고, 장마가 시작되기 직전인 5~6월 사이에 연간 생산량의 약 60%가 생산된다. 또 채염 일수는 135~150일이다.

현재 염전은 공업화, 도시화로 인해 크게 줄어들어서 겨우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그리고 전매 제도가 페지되고 민영 염전이 크게 개발되어서 현재는 기능성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이 각광을 받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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