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5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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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慶湜 |
영어공식명칭 | Choe Gyeongsik |
이칭/별칭 | 명곡(明谷),선여(善餘),여선(汝善),덕여(悳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인진 |
[정의]
조선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출신 문신.
[가계]
최경식(崔慶湜)[1660~1717]의 본관은 경주(慶州)로, 자는 선여(善餘)인데 규장각본 『국조방목』에는 여선(汝善)으로, 국립중앙도서관본 『국조방목』에는 덕여(悳餘)로 표기되어 있으며, 호는 명곡(明谷)이다. 최경식은 조선 개국원종공신으로 병조판서에 오른 뒤 광정(匡靖)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은 최단(崔鄲)의 10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 최인(崔認)은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공을 세워 지평(持平)에 증직되었고, 할아버지 최동립(崔東岦)은 한강 정구(鄭逑) 문인으로 천거에 의해 부호군(副護軍)에 제수되었다. 아버지 최진남(崔鎭南)은 문과에 급제하여 담양부사, 진주목사, 사헌부 장령(掌令) 등에 이르렀는데 세상에서 청백리로 칭송하였다. 어머니는 통덕랑 이인배(李仁培)의 딸인 흥양이씨(興陽李氏)이다. 부인은 진주 목사 권우형(權宇亨)의 딸인 안동권씨(安東權氏)와 참봉 이의천(李倚天)의 딸인 영천이씨(永川李氏)인데 슬하에 네 아들최응태(崔應泰), 최구서(崔龜瑞), 최용서(崔龍瑞), 최준서(崔駿瑞) 등과 강세은(姜世殷), 이세록(李世祿), 정세제(鄭世濟), 윤면도(尹勉道) 등에게 출가한 네 딸을 두었다.
[활동 사항]
최경식은 일찍부터 학문에 나아가 경전(經傳)의 대략적인 뜻에 통하여 약관에 소문이 드러났다. 1699년(숙종 25)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學諭), 학정(學正), 박사, 예·병조 좌랑,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병조 정랑, 울산 부사, 사헌부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고, 진주 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사망하였다. 울산 부사 재임 시에는 주자(朱子)의 “치민여팽선어(治民如烹鮮魚)[백성 다스리는 일은 생선을 삶는 일과 같다].”라는 여섯 자를 써서 걸고 항상 눈으로 보면서 스스로 경계하였으며, 향교에서 향약을 베푸니 문교가 크게 일어나고 교화가 크게 행하여 울산 사람들이 일컫기를 신군(神君)이라 하였다.
[묘소]
최경식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덕산촌(德山村)에 있었으나 해서촌(解西村)[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대곡(大谷)으로 이장하였다. 묘갈명(墓碣銘)은 장석영(張錫英)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