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8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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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郭衛國 |
영어공식명칭 | Kwak Wiguk |
이칭/별칭 | 자고,낙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대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도 현풍현 출신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자고(子固), 호는 낙수(洛叟). 증조할아버지는 진사(進士) 곽지정(郭之貞), 할아버지는 함안 군수(咸安郡守)를 지낸 곽황(郭趪)이다.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곽종경(郭宗慶), 어머니는 학유(學諭)를 지낸 여응구(呂應龜)의 딸 성산 여씨(星山呂氏)와 좌랑(佐郞)을 지낸 홍익세(洪翼世)의 딸 남양 홍씨(南陽洪氏)인데, 곽위국은 남양 홍씨의 소생이다. 부인은 군수(郡守)를 지낸 이의활(李宜活)의 딸 여주 이씨(驪州李氏), 통덕랑(通德郞) 박충구(朴翀衢)의 딸 순천 박씨(順天朴氏), 봉사(奉事)를 지낸 강수인(姜壽仁)의 딸 진주 강씨(晉州姜氏)이다.
[활동 사항]
곽위국(郭衛國)[1587~1656]은 1587년[선조 20] 경상도 현풍현 솔례(率禮)[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대리]에서 출생하였다. 사수(泗水)[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에 머무르고 있던 정구(鄭逑)를 찾아가 학문을 배웠으며, 장현광(張顯光)·정경세(鄭經世) 문하에도 왕래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스승 장현광이 경상 좌도(慶尙左道) 호소사(號召使)에 임명되었다. 장현광은 격문을 돌려 창의(倡義)를 권유하였고, 곽위국도 이에 호응하여 향병(鄕兵)을 모아 한양으로 적들을 피해 진격하였으나, 적군이 물러가 도중에 돌아왔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이 소식을 들은 현풍현의 인사들은 창의를 결의하였고, 곽위국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곽위국은 의병을 이끌고 추풍령(秋風嶺)으로 진격해 진을 친 뒤, 적들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적들과 강화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원통해 하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1637년[인조 15] 겨울 조정에서 천거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다. 1638년 용양위(龍驤衛) 부사과(副司果), 1640년[인조 18] 귀후서(歸厚署) 별제(別提)에 임명되어 한양에 머물렀는데, 이때 김세렴(金世濂)·민응형(閔應亨)과 교유하였다. 1642년 내자시(內資寺) 주부(主簿)에 올랐으나, 얼마 뒤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50년[효종 1]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겨울 목천 현감(木川縣監)으로 부임하였는데, 재임 중 치적을 남겼다.
[저술 및 작품]
유고(遺稿)를 엮은 『낙수 곽공 유사(洛叟郭公遺事)』 1책이 전한다.
[묘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오설리에 묘소가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