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550
한자 南地藏寺 碑石群
분야 종교/불교
유형 유적/비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남지장사길 95[우록리 87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동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01년연표보기 - 남지장사 비석군 건립[운계당 대선사 송덕비]
건립 시기/일시 1801년연표보기 - 남지장사 비석군 건립[경운당 대선사 선덕비]
건립 시기/일시 1812년연표보기 - 남지장사 비석군 건립[모계당 대선사 송덕비]
현 소재지 남지장사 비석군 -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남지장사길 95[우록리 872]지도보기
성격 공덕비
관련 인물 축연|취찰|미화
재질 석재
크기(높이) 운계당 대선사 휘 축연 송덕비 비좌 94㎝[길이]|47㎝[너비], 비신 101㎝[높이]|41㎝[너비]|15㎝[두께], 모계당 대선사 휘 취찰 송덕비 비좌 81㎝[길이]|66㎝[너비], 비신 114㎝[높이]|47㎝[너비]|17.5㎝[두께], 경운당 대선사 휘 미화 선덕비 비좌 80㎝[길이]|43㎝[너비], 비신 99㎝[높이]|31㎝[너비]|14.5㎝[두께]
소유자 남지장사
관리자 남지장사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남지장사 경내에 있는 조선 후기 승려들의 공덕비.

[개설]

조선 후기 남지장사(南地藏寺)의 중창과 관련된 승려 세 명의 공덕비 3기가 경내에 보존되어 있다. 세 명의 승려는 운계당 대선사 축연, 모계당 대선사 취찰, 경운당 대선사 미화이다. 승려들에 대한 관련 기록이 더 이상 확인되지 않아 생몰년과 이력은 자세하지 않다.

[위치]

남지장사의 종루인 광명루의 동쪽에 왼쪽부터 운계당 대선사 휘 축연 송덕비, 모계당 대선사 휘 취찰 송덕비, 경운당 대선사 휘 미화 선덕비가 위치하고 있다.

[형태]

3기의 비는 모두 비좌(碑座) 위에 규수형(圭首形)의 비신을 세웠다. 비좌의 하부는 매몰되어 있다. 운계당 대선사 휘 축연 송덕비는 비좌 길이 94㎝, 너비 47㎝이고, 비신 높이 101㎝, 너비 41㎝, 두께 15㎝이다. 모계당 대선사 휘 취찰 송덕비는 비좌 길이 81㎝, 너비 66㎝이고, 비신 높이 114㎝, 너비 47㎝, 두께 17.5㎝이다. 경운당 대선사 휘 미화 선덕비는 비좌 길이 80㎝, 너비 43㎝이고, 비신 높이 99㎝, 너비 31㎝, 두께 14.5㎝이다.

[금석문]

1. 운계당 대선사 송덕비

앞면 중앙에 '운계당 대선사 휘 축연 송덕비(雲溪堂大禪師諱竺演頌德碑)'라 쓰여 있으며, 앞면 오른쪽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서산십일상봉팔세(西山十一霜峰八卋)[서산대사의 11세손이요, 상봉 스님의 팔세손이시다 ]

한운청풍환모중건(寒雲淸風喚慕中建)[한운 스님의 맑은 기풍, 환모 스님이 중간에 세우셨네]

해영여음갱생이지(解影餘陰更生二枝)[혜영 스님의 넉넉한 음덕이 다시 두 가지가 더 생겨났네]

앞면 왼쪽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월유아사성본강개(粤惟我師性本慷慨)[아아 옛적 우리 대사께서는 성품이 본래 강직하고 기개가 있으셨네]

노심노력유공유덕(勞心勞力有功有德)[마음과 몸으로 애쓰고 노력하여 공덕을 이루셨네]

석면가어비전천조(石面可語俾傳千兆)[비석에 기록할 만하니 천억 년 후까지 전하리라]

오른쪽 옆면에 상원갑신유삼월일립법제동봉휘윤정(上元甲辛酉三月日立法弟東峯諱允定)이라 쓰여 있다. 신유년은 1801년을 말한다.

2. 모계당 대선사 송덕비

앞면 중앙에 '모계당 대선사 휘 취찰 송덕비(慕溪堂大禪師諱取札頌德碑)'라 쓰여 있으며, 앞면 오른쪽에는 아래와 같이 쓰여 있다.

운봉양구촉목개비(運逢陽九觸目皆非)[전쟁의 재앙이 다가오는 운세를 만나니, 눈에 뜨는 모든 것이 다 잘못 되었네]

금당훼괴옥호잠휘(金堂毁壞玉毫潛輝)[부처님의 법당은 훼손되어 무너지고, 부처님의 옥호는 빛이 사라졌도다]

만원질려전거아수(滿園蒺藜剪去阿誰)[마당에는 가득히 가시나무 자랐으니, 이것을 잘라 없앨 이 그 누구란 말인가?]

앞면 왼쪽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월유아사풍래탁석(粤惟我師風來卓錫)[아아 지난 날 우리 대사께서는 바람 따라 오셔서 석장(錫杖)을 높이 세우셨네]

고설수년담소이복(鼓舌數年談笑而復)[몇 년에 걸쳐서 예기하고 설득하여, 이야기하고 웃으며 절을 다시 지으셨네]

편석가어비수천억(片石可語俾壽千億)[한 조각 비석이 말을 할 수 있으니, 억천년 이 일을 전하게 하리라]

오른쪽 옆면에는 가경십칠년임신십이월일립(嘉慶十七年壬申十二月日立)이라 쓰여 있다. 임신년은 1812년이다.

3. 경운당 대선사 선덕비

앞면 중앙에 '경운당 대선사 휘 미화 선덕비(景雲堂大禪師諱未化善德碑)'라 쓰여 있으며, 앞면 오른쪽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정산위중유사지학(頂山爲重惟師之學)[최정산이 육중하니 대사의 학문과 같고]

조계우청유사지덕(曹溪尤淸惟師之德)[조계수가 더욱 맑으니 대사의 덕행과 같네]

상송반야명료자성(常誦般若明了自性)[항상 반야경을 읽어서 자성을 밝히고]

다음은 앞면 왼쪽에 있는 글이다.

자성참구불퇴보리(自性叅究不退菩提)[자성을 참구하니 불퇴전의 보리심이라]

수선가람불유불근(修繕伽藍不惟不勤)[가람을 고쳐 수리하니 부지런하지 아니함이 없으셨네]

편석가기비대유통(片石可記俾代流通)[한 조각 돌에 기록하여 대대로 이 사실 전하리라]

왼쪽 옆면에는 상원갑신유삼월일제자박보명성윤립(上元甲辛酉三月日弟子朴普明性允立)이라 적혀 있다. 신유년은 1801년이다.

[현황]

남지장사 비석군은 비교적 관리가 잘 되고 있으나 모계당 대선사 취찰 송덕비는 전면의 일부가 훼손된 상태이다. 비문은 약간의 마멸과 일부 훼손이 있다. 남지장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남지장사의 중창에 관여한 승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관련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남지장사의 변모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