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1291
한자 保寧-建設-水沒地區 移住民-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필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9년 - 충청남도 보령권역 보령댐 건립 계획 발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1년 8월 - 보령댐 건설 계획으로 주민들 이주 시작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2년 6월 - 보령댐 착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8년 10월 - 보령댐 완공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에 건립된 보령댐보령댐 수몰에 따른 수몰 지역 이주민의 삶.

[보령댐 건설]

1980년대 반복적인 가뭄과 홍수로 국가 차원의 물관리 대책에 대해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1987년 여름 충청남도 일대에 큰 홍수가 일어나 인명 및 재산 피해가 컸다. 이에 정부는 물관리 대책에 대한 연구에 착수하였고, 1989년 충청남도 보령권역에 보령댐을 지을 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정부와 충청남도는 보령댐을 이용해 충청남도 서부 지역 광역상수도망을 구축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1991년 착공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물론, 주민들 모두가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안정적인 물관리, 광역상수도망 구축이라는 정부의 명분 앞에 반대 의견은 주목받지 못하였다. 따라서 주민들은 이주비라도 받기 위해서는 수몰과 이주를 받아드리고 협상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보령 다목적댐은 1992년 6월 착공하여 1998년 10월 완공되었다.

보령댐웅천천의 수원을 중심으로, 보령시 주산면미산면의 경계지점에 건설되었다. 댐이 건설된 지역은 양쪽에 높은 산이 솟아 있어서 하천 폭이 좁고, 자연적으로 방파제가 형성되어 있어 댐을 건설하기에 적당하였다. 총저수량은 1억1,690만㎥로 중형 댐에 속하며, 충청남도 보령시, 서산시, 당진시, 서천군, 청양군, 홍성군, 예산군 등 서부 지역 8개 시·군에 용수공급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댐을 짓기 위해 보령시 미산면 일대의 수몰은 피할 수 없었다.

수몰되는 지역은 보령시 미산면도화담리, 풍계리, 용수리, 평라리 일원이었고, 자연마을로는 퐁년동, 거문, 완성, 수현, 용암, 천방, 평장, 자라실, 웃골, 성재 등 10개 마을이었다. 수몰 면적은 총 6.44k㎡였다. 수몰되는 4개리는 아미산과 빈정산, 양각산 사이 계곡을 따라 자리하였으며, 웅천천에 연이어 있어 대체로 배산임수의 자연환경을 가진 지역이었다. 마을은 산비탈을 따라 형성되어 있었으며, 평지 지역에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논과 밭이 펼쳐져 있었다.

[수몰지구의 역사와 마지막 풍경]

보령댐 수몰 지역에는 1991년 8월부터 주민들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이주가 한 창이었던 1993년 3월 말 기준 497가구 1,985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총 6.44k㎡ 중 농지가 2.97k㎡, 임야가 1.67k㎡, 대지가 0.16k㎡, 기타 용지가 1.64k㎡였으며, 건물은 2,026동이 있었다.

풍계리의 경우 풍년동과 완성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풍년동에는 경주 이씨(慶州李氏) 석탄공파(石灘公派)가 17세기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고 있었다. 완성마을의 경우 18세기 밀양 박씨(密陽朴氏)가 입향하여 세거하였고, 풍년동의 경주 이씨 중 일부가 이거하여 함께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용수리에는 용암[용바위]마을, 천방[천뱅이]마을, 수현[물줄]마을, 거문[거무러지]마을 등이 있었다. 가장 큰 마을은 용암마을이었으며, 경주 이씨가 가장 강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용암마을에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1호로 지정된 삼사당(三思堂)이 있었는데,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사우(祠宇)이다. 이제현경주 이씨 익재공파(益齋公派)의 파조인데, 용암마을에 세거한 경주 이씨들이 18세기 조성하여 1990년대까지 제사를 지내고 관리하던 곳이었다. 또, 수현마을은 오얏골, 중말, 염뜸을 합친 이름이었는데, 이곳에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2호 수현사(水絃祠)가 있었다. 수현사는 고려 말 명신 염제신(廉悌臣)[1304~1382]과 그의 아들 염국보(廉國寶), 염송은(廉松隱), 염경은(廉耕隱) 등 파주 염씨(坡州廉氏) 4현이 봉안된 사우이다. 1873년 창건되었으며, 염뜸에 세거하던 파주 염씨들이 관리하였다.

평라리에는 평장골, 자라실, 웃골, 삼거리, 서짓골, 안뜸, 성재 등의 자연마을이 존재하였다. 또한, 평라리에는 면사무소, 우체국, 농협 등 미산면의 행정기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마을인 평장골은 남포 백씨(藍浦白氏)의 중시조 백임지(白任至)[1130~1191]가 출생한 마을로 알려져 있어, 남포 지역 토성인 남포 백씨의 근거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도화담리의 경우 보령댐 상류에 해당하여 수몰 면적도 적고, 수몰 마을도 없었다.

종합해 보면, 보령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는 지역에는 고려 시대부터 취락이 형성되어 사람이 거주하였다. 다양한 성관의 사람들이 확인되는데, 특히, 경주 이씨와 파주 염씨, 밀양 박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해 왔다. 이들은 사우를 통해 동족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사우 두 곳은 역사성을 인정받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었다.

1993년 당시 세거는 확인되지 않지만, 수몰 지역은 남포 지역의 토성 남포 백씨에게도 의미있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주민들은 마을의 수몰을 아쉬워하며 마지막을 의미있게 기억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열린 행사가 1991년 4월 22일의 미산국민학교 동창회였다. 1941년 개교한 미산국민학교는 수몰되는 용수리에 위치하여, 미산면 수몰 지역 주민들이 대부분 재학했던 학교였다. 1991년 8월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기 전에 열리는 미산국민학교 운동회 겸 동창회는 수몰 지역 출신 출향민, 미산국민학교 동문들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미산국민학교 동창회장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동문들에게 편지를 써서 마지막 교정 동창회 개최를 알렸고, 동창회 당일 재학생 220명, 학부모 300여 명과 재경동창회 50여 명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재학생, 학부형과 어울려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웅천천 다슬기 잡기 시합, 2인 3각, 풍선 터뜨리기, 웅천천 물지게 나르기 시합 등을 펼쳤고, 해가 지자 ‘반달’ 등의 동요와 ‘이별의 노래’를 부르며 눈물의 이별을 하였다. 재경 동문들은 비디오카메라를 가지고 학교 곳곳을 촬영하여 참석하지 못한 동문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마지막 동창회를 뒤늦게 언론보도로 접한 동문들은 신문사에 자신의 추억과 소회를 담은 글을 보내 추억과 아쉬움을 공유하기도 하였다.

[이주 정책과 보령댐 완공]

보령댐 건설에 따른 수몰 지역민 보상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땅에 대한 보상은 상대적으로 낮았던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보령댐 수몰 지역의 경우 밭 한 평[3.3㎡]당 2만 5000원, 논 한 평당 3만 5000원, 임야 한 평당 4,000원과 묘소이장비 80만 원, 벽돌 콘크리트 구조 건물 한 평당 80만 원, 영농비, 농기계값 등을 보상 받을 수 있었다. 이에 따라 토지보상비로 417억 원, 건물보상비로 117억 원, 광업소 및 문화재 보상비로 41억 원, 기타 보상비로 179억 원 등 총 보상비로 756억 원이 지출되었다.

수몰 지역에 집과 땅이 있는 경우 대략 1억 원 내외로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땅과 집이 없는 영세민, 세입자의 경우 받을 수 있는 보상은 수백만 원에 불과하였다. 삶의 터전을 잃은 대가로는 너무 적은 보상이었다. 그나마 집과 땅이 있는 경우 새로운 집은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땅을 사 집을 짓고 이사하면 남는 돈은 없었다. 생계수단을 마련하기에는 너무 적은 보상이었다. 특히, 고령층은 삶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젊은 층은 보상금을 받아 새로운 직장을 구해 도시로 삶의 터전을 옮기거나, 보령댐 인근의 유원지 개발을 예측하고, 음식점 등 위락시설로 업종전환을 꾀하였다. 그러나 평생 농사를 지어온 고령층이 변화에 대응하기는 어려웠다. 이들은 고향을 잃었다는 상실감을 느낌과 동시에 노후 걱정을 해야하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정부 당국 또한 이러한 문제를 파악하고 보상금을 올리고, 주변 지역 수익사업에 수몰 지역 주민에게 우선권을 부여하는 등 대책을 발표하기도 하였지만, 어느 정도 실효성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오히려 담당 공무원과 결탁하고 엉뚱한 사람이 보상금을 부정 수급하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착공 6개월 만에 공사가 중단되었다. 일부 주민들이 정부와 협상을 중단하고 이주를 거부했던 것이다. 공사 중단에 따라 공기는 늘어났다. 주민들은 간접 피해 지역에 대한 보상과 보상금 현실화를 요구하였다. 또, 상수도 조성 예정지 수원지의 인근 폐광에서 중금속이 흘러나오고 있음이 알려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추가적인 정화사업이 벌어졌고, 보상금 협상은 계속되었다. 공사는 재개와 중단이 계속되어, 당초 계획보다 1년여 늦은 1998년 10월 보령댐이 완공되어 담수에 들어갔다.

[이주민의 고향 기록과 기억]

보령댐 완공 이후 수몰 지역 주민들은 흩어졌다. 하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흩어질 수 없었다. 보령시는 수몰 지역 주민을 위로하고,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2007년 보령댐 애향의 집[현 보령댐애향박물관]을 지었다. 2007년 11월 문을 연 보령댐애향박물관은 1층에 수몰되기 전 마을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 상영되고, 전시실에서는 수몰민들이 사용하던 도구, 유물, 특산물, 수몰 전 찍었던 가족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현재 보령댐애향박물관에는 인근 지역을 여행하던 관광객과 수몰 지역을 그리워하는 이주민들이 간혹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

이주가 이루어진 지 약 30년이 지난 2022년 현재까지도 수몰 지역 이주민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수몰 지역 관련 기억을 자서전으로 만들어 발표하거나, 매년 11월 보령댐애향박물관에서 보령댐을 바라보며 망향제를 지내기도 한다. 망향제에 참석한 이주민은 아직도 고향집이 눈에 아른거린다고 하며, 조상에게 죄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수몰지구 기록의 필요성]

보령댐의 수몰 지역과 관련하여 아쉬운 점은 보령댐 수몰 지구에 대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기록, 연구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댐 건설로 인한 수몰 지구 연구의 필요성은 1960년대부터 국내외 문화인류학계에서 지적되어 왔다. 수몰 지역 이주민들은 재정착 이후 겪는 여러 환경 변화, 문화·예술 유산의 파괴, 사회적 결속의 해체, 경제적 기회 박탈 등에 대해 연구 필요성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1970년대부터 안동댐을 비롯한 대형 댐이 다수 건설되어 수몰 이주민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차원의 기록이나 연구는 미진하였다. 당대의 연구는 행정적 성격이 강한 국가의 용역에 의한 연구이거나, 학자 개인의 호기심에 연유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또, 오늘날의 연구도 안동댐, 소양강댐 등 대규모 댐 수몰 지역에 대한 연구는 다수 이루어졌지만, 1990년대 이후 짓기 시작한 보령댐 등의 중형 댐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중형 댐의 경우 대형 댐보다 수몰 지역이 작고, 이주민도 적어 연구 대상에서 소외되었던 것이다.

최근에도 대규모 개발사업, 저수지 혹은 댐 건설 등으로 인하여 원치 않은 이주를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기록의 중요성을 고려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해당 지역에 대한 전면 3D 스캔, 역사·민속 기록 보고서 발간, 주민에 대한 구술 채록 등이 상세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보령댐 수몰 지구에 대한 기록도 늦었지만 필요하다. 물리적인 3D 스캔이나 역사·민속 조사는 다소 어렵더라도 이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구술 채록이나 사진, 유물 수집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보령애향박물관을 중심으로 수몰 지역에 대한 연구를 적극적으로 수행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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